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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온 사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선생이 외부여과기 청소를 했다. “형 돌아오시면 피곤할 텐데 쾌적하시라고요.” “거 하고 나면 너는 상당히 안 쾌적해질 텐데? 휴가를 왜 그딴 데 써 인마. 날씨 좋다, 나가 놀아.” 그러나 기어이 해보겠다기에 하다 제정신 들면 당장 말아라. 시클리드 나약하지 않으니 물 좀 어수선해져도 잘 견딘다. 당부했지만 이 새끼는 기어이 그걸 다 했다. 3자광 하이, 3자광, 2자광 수조의 여과기는 메인만 해도 무려 다섯 대. 거기에 보조여과기 한 대씩 끼고 있어 도합 열 대에 여과재만 못해도 40리터다. 입출수관 한 쌍씩 다섯 쌍. 물 보충 내지 환수는 덤이고. 이건 뭐 미친놈이 아닐 수 없다. 나라면 먹지 못할, 아니 안 먹을 마음. 나는 이제 네놈의 구피에게 뭔가 보답해야겠다만, 우선 놈부터 먹이려고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대표님과 함께 식사했고 메뉴가 적당해 술도 마셨다. 지금부터는 물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나 결국 물 생활의 폐해 정도의 헤프닝으로 끝나길 바라며 쓴다. 식사 후 이튿날부터 모조리 몸 상태가 개판이 되는데, 형인가, 난가, 넌가. 알 수가 없다. 일단 내 가족이 별 증상 없는 것으로 보아 나는 아닌 게 확실하고. 형은 여행 전부터 유사 증상이 있었으나 음성이었다. 그러면 이 선생아 너는 도대체 왜. 우리 셋 중 나와 형은 경미한 증상인데 이 새끼만 발열에 근육통에 난리가 난 것이다. 아 물론 새끼도 현재까지는 음성.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자, 이게 뭐 아프면 다 코로나 그러지 좀 말고 합리적으로 접근하자고. 일단 형은 나 여행 일주일 전부터 이미 컨디션 난조였어. 양성이었다고 해도 시일이 꽤 지났기 때문에 전염성은 없다. 감기든 코로나든 아직 회복이 덜 된 거라 생각하자. 다음 나. 앞서 말했듯 며칠 함께 먹고 자고 놀았던 내 가족에게는 아무 증상이 없다. 나도 아닌 걸로. 그저 여독으로 피곤했던 거라 치자. 그러면 이 선생. 딱히 의심되는 동선이나 접촉 상황이 잡히지 않았고 어울렸던 사람들 모두 이상 없다. 그렇다면 너는 코로나가 아니라 내 예언대로 여과기 청소로 인해 쾌적하지 못한 몸이 된 게 아닐까. 단순 근육통에 몸살이 아닐까.

이래도 곤란하고 저래도 미안한 일주일, 오늘로 꽉 채웠다. 기간 내 계속 음성이었고 컨디션도 좋아졌으니 됐고. 아니, 된 게 맞나. 차라리 코로나였다면 마음 덜 불편했을까. 제발 시키지도 바라지도 않은 일은 하지 맙시다. 어디가 제일 아팠냐 물었더니 손목과 발목과 어깨와 등이란다. 망할 자식. 왜 뜻한 바 없이 미안한 마음을 갖게 만드냐고. 갑갑한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괜히 약이 오른다.

근데 있잖아.
내가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 좀 했는데.
형이 니 꼼꼼함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 손끝이 야물잖애?
그런데 살다 보면 아주 드물게 기묘한 일이 생기지 않냐?
예? 왜 이래요 무섭게.
아침에 형수랑 니 이야기를 하다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축양장을 열고
여과기 앉은 바닥을 쓸었는데 물기가 묻는 거야.
출수관 연결부가 촉촉한 게 한 방울씩 흐르고 있더라.
아니 결합은 잘 된 상태가 맞았어. 호스의 문제였는지,
더블 탭의 문제였는지. 원인은 나중에 찾지 싶어,
일단 새 걸로 전부 교체하고 마무리했지.
기묘해. 그렇지?
ㅠㅠ 제가 앉은 바닥도 촉촉해지네요.
너를 의심하진 않았지. 장비를 의심했을 뿐.
와. 거 결합은 참 잘됐던데 빡빡하니.
근데 이게 질질 샌다?
ㅋㅋㅋㅋㅋㅋㅋ 아 보람도 없는 근육통. 근데 형.
오냐.
왜 거기만 샜을 거라 생각해요? ㅋㅋ
엿은 먹이는 게 아니라 은근히 심어두는 거라 배웠습니다.
이 자식아 ㅋㅋㅋㅋㅋ

고맙다.
무엇보다 바나나 꼬물이 넷
돌아오자마자 브라인 먹일 수 있게 끓여준 일.
고작 네 마린데 얼마를 퍼부은 것이냐.
스탠리 런치 박스에 뭘 담아 건낼지 고민 좀 해보마.
엿?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