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ugust, 2020
그들은 서로를 보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뒤돌아서면서 서로를 알아보았다 십 년의 세월이 그 사이를 흘러갔다 그들은 늙었다 그러나 서로의 간격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표정은 몰라보게 젊어져갔다 그들은 마주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손도 내밀지 않았고 가벼운 포옹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등 돌릴 수 없는 사랑이 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그들은 기쁘게 돌아섰다 앞으로 십 년은 능히 더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해후, 김상미
July, 2020
개는 고양이보다 더 이기적이다. 애타게 바라는 게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양이는 집사를 향해 '이것 좀 해줄래?' 하고 바라다가도, 반응이 영 시답잖으면 토라지거나 무시하는 걸로 응징한다. 개는 그렇지 않다. 개는 애절하게, 한결같이, 줄기차게, 열렬히! 원하는 바를 드러낸다. '내가 그걸 바라거든? 제발 좀 이렇게 해줘. 혼자 두지 말고, 나, 나를, 나만을 사랑해주지 않을래?' 물론 관계 집착은 동물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종의 성향을 미루어 짐작했을 때, 개는 고양이보다 제가 좋아하는 것에 더 집착하고 매달린다. 사랑할 때 고양이는 여러 겹의 외투를 입는다.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낸다. 슬쩍 몸을 부비고, 눈을 깜빡이고, '당신을 좋아해!'라고 암시한다. '비유와 상징'에 능한 고양이들은 어쩌면..
July, 2020
사랑이 끓어넘치던 어느 시절을 이제는 복원하지 못하지. 그 어떤 불편과 불안도 견디게 하던 육체의 날들을 되살리지 못하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 . 그래도 약속한 일은 해야 해서 재회라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때맞춰 들어온 햇살에 절반쯤 어두워진 너. 수다스러워진 너. 여전히 내 마음에 포개지던 너. 누가 더 많이 그리워했었지. 오늘의 경건함도 지하철 끊어질 무렵이면 다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서로 들고 왔던 기억. 그것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것이 저주였음을. 재회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아니었음을. 오래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를. 지금 이 진공관 안에서 끝끝내 ..
June, 2020
나는 풍등에 쓸 말을 여러번 고쳐 썼다. 다이어트, 주택청약 당첨, 포르셰 카이엔, 첫 책 대박나게 해주세요. 뭔가 다 내 진짜 소원이 아닌 것 같아 빗금을 쳐서 지워버렸다. 아마도 그러는 사이 구멍이 나버린 것이겠지. 나는 결국 풍등에 두 글자만을 남겼다. 규호. 그게 내 소원이었다. 늦은 우기의 바캉스, 박상영 퀴어 소설이라 그런가. 읽는 내도록 빗장 풀지 못했다. 전제를 떠나면, 남을 문장들이 많았을 텐데. 경직된 채로 대부분 빠르게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마지막 단편, 마지막 문장에서 누그러진다. 규호. 그게 내 소원이었다.
October, 2018
동이 트자 술집 주인은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건 인제 고만 나가 달라는 완곡한 몸짓이었다. 몇 번을 울다가 내 무릎을 베고 누운 애인의 떨리는 어깨를 도닥여 밖으로 나왔다. 좁은 골목까지 들지 못하는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습관처럼 손을 잡고 걸었다. 삼천오백원어치만큼 하늘이 밝아 있었다. 슬픔을 화폐로 쓰는 나라가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억만장자일 거야. 반지하방에서 옥탑방을 거쳐 볕이 고만고만 드는 이층집으로 옮겨 앉는 동안 당신도 슬픔에 대해 몇 마디 농담쯤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애인에게 침대와 선풍기를 내어주고 바닥에 누웠다. 입추가 코앞인데, 채 가시지 않은 건 더위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놓아둔 애인의 손전화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이름이 여러 번 떠올랐다. 나는 괜히 확인을 미루고 ..
June, 2018
"무슨 말이 그래?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착하다, 좋다, 그런 건 일종의 상태 아니냐? 그랬다가 안 그러기도 하는 거 아니냐? 그냥 너나 나 같은 사람이잖아. 그 애가 죽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원래 질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 죽으면 너는 뭐라고 말할 건데?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왜 다들 무책임하게 좋았다고만 해? 불쌍하니까, 씨발 존나 불쌍하니까 다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생각하라는 거야, 뭐야? 그럼 좋은 사람 이외의 그 애는 다 어디로 가는데? 어떻게 좋은 게 그 애의 전부야? 왜 함부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좋은 사람, 임현
June, 2018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 선물을 준다는 것은 돌려받을 대가를 바라서이고 남을 위한 칭찬은 곧 나의 평판으로 이어져서 훗날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되지. 알아듣겠니? 지금 당장의 손해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나중의 이익을 담보하게 된단다. 손해 아니라 투자. 선물 아니라 거래. "그래, 바쁜데 미안하구나." 그게 뭐였겠니? 과연 내가 미안해한 것은 무엇일까. 무얼 사과한 걸까. 너무 멀리 생각하지 말아라. 그것은 단순히 하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나는 아무것도 사과하지 않았다. 다만 의도가 있었을 뿐이지. 나는 너와 달리 무례한 인간이 아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도리를 지킨다는 인상을 상대방에게 심어주려는 목적에서였다. 그게 더 근사한 일이라고. 내가 더 멋있다..
June, 2018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부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고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