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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실 문이 확 열렸다. 여자아이는 종이컵 두 개 중 자기 앞에 더 가까운 컵을 얼른 바닥으로 떨어뜨린 뒤 발로 차서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여기서 공부하니? 숙직 교사가 물었다. 네. 여자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숙직 교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눈으로 동아리실을 한 번 훑어 보더니 문을 닫고 나갔다. 여자아이는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계속 공부하는 척했다. 글자들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 후에야 여자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어찌나 힘을 주고 있었던지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여자아이는 잘못 열면 안에 있는 남자아이가 다치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조심 캐비닛 문을 열었다. 남자아이는 빛에 놀란 듯 눈을 깜빡거렸다. 다른 세상에라도 다녀온 듯한 표정이었다. 여자아이가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와, 진짜 나...... 그때 남자아이가 캐비닛 안에서 여자아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여자아이의 몸이 앞으로 기울며 캐비닛 안에서 두 아이의 입술이 맞닿았다. 베이비로션 냄새, 겨드랑이 냄새, 비냄새, 젖은 나무와 이끼 냄새, 다크초콜릿 냄새, 강아지 발바닥 냄새, 그 밖의 온갖 강렬하고 유혹적인 냄새들.

나 춤추고 싶어.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남자가 물었다. 응.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와 남자는 바 테이블과 일반 테이블 사이 공간에 서서 서로 몸을 붙였다. 음악이 바뀌었고, 그들은 껴안고 춤을 추었다. 살인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던 젊은이들이 남자와 여자를 잠깐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 꼭 미국 사람들 같다. 남자가 말했다. 미국 사람들은 이런 바에서 막 춤을 추잖아. 여자가 말을 보탰다. 미국 할아버지 할머니. 조금 더 몸이 뚱뚱하면 완벽할 텐데. 과거와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재만 보는 사람이 더 유리할 때도 있어. 여자가 말했다. 과거를 잊을 수 있으니까. 과거를 잊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널 지켜줄게. 과거로부터, 너를, 지켜줄게.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장강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