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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전생이었는지 아득하지만 우리가 이 계절에 처음 만났던 기억이 있다. 나무들이 세상을 향해 마지막 등불을 밝혀 드는 무렵이었다. 나는 조금 가벼운 절망을 앓고 있었고, 상심한 내부를 잘 들여다보기 위해 날마다 술집과 술집 사이에서 떠돌았다. 그럴수록 내 상처가 잘 보였다. 내 저항은 고작 세상의 변방 쪽으로 나를 데려다 눕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조금 안심이 되어서 울지 않고도 한 계절을 잘 견딜 수 있었다.

종종 우산도 없이 비를 맞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도 그런 것이었다. 아무런 예감도 없이 막다른 골목에서 운명과 맞닥뜨리는 것. 운명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마침내 운명의 속살까지 다 비쳐 보이게 되는 것.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눈을 감고 운명이 내미는 칼끝을 받아들였다. 깊이 찔려서 무럭무럭 피 흘리고 싶은 낭패감조차 감미로웠다. 단 하루여도 좋을 지상의 날들이 11월의 구름처럼 지나갔다.

살아서 찬란한 것들은 위독하다. 꽃들은 곧 죽고, 잎사귀들은 속절없이 저문다. 나는 다시 술집으로 돌아왔다. 찬란하지 않아도 깊이 깊이 위독할 수 있는 나의 술자리로 나는 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잎사귀를 허물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는 병든 나무다. 스스로 잎사귀를 버리는 힘으로 나무는 겨울을 건너간다. 그리고 이 계절은 조금 가벼운 절망을 앓기에 얼마나 찬란한 시절인가.

류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