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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자 술집 주인은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건 인제 고만 나가 달라는 완곡한 몸짓이었다. 몇 번을 울다가 내 무릎을 베고 누운 애인의 떨리는 어깨를 도닥여 밖으로 나왔다. 좁은 골목까지 들지 못하는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습관처럼 손을 잡고 걸었다. 삼천오백원어치만큼 하늘이 밝아 있었다. 슬픔을 화폐로 쓰는 나라가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억만장자일 거야. 반지하방에서 옥탑방을 거쳐 볕이 고만고만 드는 이층집으로 옮겨 앉는 동안 당신도 슬픔에 대해 몇 마디 농담쯤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애인에게 침대와 선풍기를 내어주고 바닥에 누웠다. 입추가 코앞인데, 채 가시지 않은 건 더위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놓아둔 애인의 손전화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이름이 여러 번 떠올랐다. 나는 괜히 확인을 미루고 있던 복권을 찾아보고, 그 빗나간 숫자들이 적힌 어느 시인선의 시집들도 뒤적였다. 침대 위의 베갯잇에는 어느새 침 자국이 동전같이 피어 있었다. 옹알거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선풍기 바람에 날려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어떤 말도 상처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말도 인제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상처받았다.

양을 세듯 나는 낯선 이의 이름을 오래 헤아렸다. 꿈속에서는 가시를 세운 괴물 두 마리가 꼭 껴안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심장이 다가붙을수록 더 많은 피를 흘렸다. 가시에 찔리느라 모자라는 피를 서로의 몸을 핥으며 채웠다. 눈을 뜨니 애인과 나는 모로 누워 서로 다른 벽을 보고 있었고, 웅크린 채였다. 오늘이 월요일인 걸 떠올리곤 나는 집을 나섰다. 열쇠는 두고 나왔다. 애인도 오늘 무슨 약속이 있다고 했었는데, 에어컨도 없는 집에서 자고 있는 것이 걱정이었다. 애인도 나도 이 여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사장님은 왜 이리 일찍 나왔느냐며 웃었다. 그 여름 우리가 처음 손을 잡았을 땐 너도 손에 땀이 많다며 스스러워하며 배시시 웃었었다. 계속 미끄러지는 그 손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은 어떤 완곡한 몸짓일까. 애인의 손전화 비밀번호는 여전히 그날이었다. 이마에 땀방울을 닦아주기엔 너무 눅눅했을 베갯잇을 반성하는 동안 찾아든 밤은 하루 새 숨이 죽어 있었다. 팔뚝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좁은 골목에 들 때 누군가는 훅 훅 더운 숨을 뱉으며 제 발로 집을 떠나오고 있었다. 신열(身熱)이 깊은 사람이 오한을 곁따라 앓는 듯한, 늦은 여름이었다.

만하(晩夏), 이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