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ay, 2018
늦은 사람들은 신호를 위반하고 늙은 사람들은 법을 위반하지 그들이 법이기 때문에 자기 부정은 자기 갱신으로 거듭나지 법전에는 예외 조항이 늘어나지 넥타이가 점점 짧아지는 동안 목이 졸려 숨 막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지 말은 물 같고 성격은 불같아서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 수 있었지 흐를 때와 고일 때를 잘 알아서 자기 비하는 겸양지덕으로 둔갑하지 덕은 떡처럼 도타워지지 없이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식으로 법이 설령 중립적일 때에도 법전은 이미 중의적인 문장을 쓰고 있었지 들이받는 게 아니라 들이치는 식으로 사고(事故)로 위장한 채 사고(思考)를 치며 갑남(甲男)을 물들이며 을녀(乙女)를 불붙이고 있었지 하나밖에 없어서 입은 틀어막기 쉬웠지 신호는 빨간불에서 좀체 바뀔 줄을 몰랐지 법은 관습법처럼 굳어졌다가..
May, 2018
중요해. 자아내는 게. 중요해. 충만한 게. 사로잡히는 게. 지울 수가 없는 게. 중요해. 주고받는 게. 입으로 주고 귀로 받는 게. 눈으로 주고 눈으로 받는 게. 어처구니없이 풍요로워지는 게. 마음으로 주고 마음으로 받는 느낌이 중요해. 몸이 알아차리는 게. 마음이 깨닫는 게. 몸이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이 몸을 일으키는 게. 중요해. 아우르는 게. 몸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말하는 게. 중요해. 어울리는 게. 허리를 마음껏 굽히는 게. 마음을 몸처럼 구부리는 게. 틈을 틔우는 게. 결국 느낌이 중요해. 속해 있다는 게.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게. 가능하다는 게. 여지가 있다는 게. 여기가 내 공터라는 게.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스스로 한마음이 되기로 마음먹는 게..
February, 2018
나는 아이가 없다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 앞으로 뛰어가는 아이를, 얘야, 하고 불러 멈춰 세운다는 것은, 그때 저 앞에 정지한 그림자가 내게서 떨어져 나온 작은 얼룩임을 알아챈다는 것은 아이의 머리칼에 붙은 마른 나뭇잎을 떼어준다는 것은 그것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이거 봐라, 너를 좋아하는 나뭇잎이다 라고 말하며 웃는다는 것은 내가 죽어도 나를 닮은 한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먼 훗날 내 죽음을 건너뛰고 나아갈 튼튼한 다리가 지금 내가 부르면 순순히 멈춰 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 대신에 내겐 무엇이 있나 그렇다 내겐 시가 있다 내겐 시가 있다 시를 쓰며 나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건너뛰어왔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시를 썼다 군대 있을 때 아버지 장례식장..
January, 2018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July, 2017
"어쨌거나 축하합니다." 앳된 얼굴의 외국인 청년이 엄마를 보며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축하라고? 과연 내가 태어나는 것이 나와, 세계를 위해 축하할 만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계속 자랐다. 그로부터 2년 후 IMF 금융위기가 터지고, 또 조금 더 지나 도심 한복판의 빌딩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 박히고, 이라크전쟁이 발발하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하고, 또 누군가가 누군가를 공습하고, 테러하고, 학살하다가, 온 세계를 불안에 떨게 하는 경제위기 속에서, 몇년 후 그때의 나보다 겨우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 뿐인 아이들이 바닷속에 수장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축하합니다." 또다른 청년이 자국어 억양이 섞인 인사를 건넸다. 낯선 발음의 인사에 엄마가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비겁한 주..
July, 2017
맙소사. 내 옆에도 여자가 있었다. 클럽에서도 밖에서도 별말 없던 아이. 그래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아이. 거기 있었는지도 모르다가 모두 떠난 뒤에야, 아, 너도 여기 있었구나, 알아챈 아이.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런 아이. 저 속에서, 우리에게도 빛이 났을까? 시간은 새벽 세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건데? 뒤따라 나온 G가 물었다. 순순히 계산을 했나 보다. 그러고도 나를 따라오고 있다니. 문득 미안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내가 왜 얘한테 짜증을 내고 있나, 사람을 왜 이렇게 함부로 대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공기가 청명해진 느낌이었다. 오늘밤은 이제 지난밤이 되었다. 지난밤 길바닥에서 일어난 이러저러한 일들을 차근차근 떠올려보니 불면증에 시달리며 이따금 꾼 복잡한 ..
May, 2017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어떤 경우, 이문재
May, 2017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떨어지는 꽃잎과 새로 나오는 이파리가 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 접이우산 접고 정오를 건너가는데 봄비 그친 세상 속으로 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진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미간이 순해진다. 멀리 있던 것들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저녁까지 혼자 걸어도 유월의 맨 앞까지 혼자 걸어도 오른켠이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의 오른켠도 연일 안녕하실 것이다. 봄 편지, 이문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