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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9
단골 식당에서 블루베리 묘목을 받고 신나서 돌아왔다. “이분들이 농장을 하신대. 블루베리. 거기 농장에 남자 사장님이 되게 아끼는 나무가 있다는 거야. 매일 더 챙기신다는 거야. 자기, 블루베리 꽃 본 적 있어? 그게 하얀 꽃이 핀대요. 그런데 그 나무에 열린 꽃만 은근하게 붉은빛이 돈다는 거야. 사장님이 나 죽으면 너한테 묻힐 거라고 나무에 대고 그런 고백을 했다나 봐. 그런 다음부터 꽃잎이 붉어지고 다른 나무보다 훨씬 많이 피고 그런대. 되게 로맨틱하지 않아요?” “묘목이 자라면 땅으로 옮겨 심고 너를 파묻어버림으로써, 나도 내 나름의 로맨틱을 완성하겠다.” “나 묻힐 나무를 가져 온 거야?” “조용히 해. 듣고 꽃이 영 안 필 수도 있어.” 네 손을 타면 뭐든 잘 자란다. 근데 나는 언제 크나.
June, 2019
아직 내가 세상에 없을 때의 이야기가 한참 지나고 살며시 손을 잡더니, 너 가졌을 때 매일 설렜거든, 너는 그때 효도 다 했어. 그래서 좋았다는 말씀인지, 이후로 네 놈이 효도한 역사가 없어 그 한 시절로 정신승리 하고 사신다는 뜻인지 알 수 없네. 근데 뭐, 나는 죄송 안 하고.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효도라고 생각할란다. 아이고 예뻐라. 꽃 중의 꽃 자기합리화.
May, 2019
수영을 시작한 게 다섯 살. 일곱 살, 아버지가 물에 빠뜨리고 머리를 눌렀을 때에도 이러다 죽지 싶은 생각은 안 했다. 보글보글 숨을 뱉으며 평온하게 참았다. 내게 물은 언제나 익숙하고 좋았다. 부드럽고 편했다. 그러던 것을. 패닉은 물속에서 찾아 왔다. 호흡이 꼬인 것도 아니고 충분히 여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연한 압박감에 죽을 것 같다. 졸지에 사지가 뻣뻣하다. 3미터가량 남겨 놓고 다급하게 코스 로프를 잡았다. 이미 완주한 새끼는 저쯤에서 어리둥절 나를 보는데, 다시 들어가 곁으로 갈 엄두가 안 났다. 이런 거구나. 이런 식으로 느닷없구나. 물 밖으로 나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사실 아까부터 답지 않게 스트록이 엉망이라 오늘 조금 이상하다 싶었다고. 적절하게 피닉스에서는 김연우의 이별택시가 흘러나..
May, 2019
寅 : 서로 다른 걸 가진 사람들은 연결 고리가 없어서 만남이 이어지기 쉽지 않단다. 반대 형질이라 사고체계가 너무 다르고 말도 잘 통하지를 않아 지루하고 재미가 없대. 대신 큰 다툼은 없지. 그런데 서로 같은 걸 가져서 기질이 비슷한 사람들은 금세 알아보고 반하는데, 시작부터 이야기도 재밌고 손발이 잘 맞으니 물고 빨고 아주 지랄나지. 그런 반면 더럽게 싸우거든. 다툴 때의 너를 봐. 와, 이건 뭐 울부짖는 게 흡사 짐승이잖아. 그런데 여기 일지를 봐라. 개지. 너는 개. 푸른 개. 얼굴도 완전 강아지상. 이런 댕댕이. 자, 나는 호랑이. 그러니까 하룻댕댕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면 쓰냐 안 쓰냐. 내가 너 들개로 변할 때마다 오냐오냐하는 건, 아이고 귀엽다. 그래, 오늘 실컷 까불어라. 그러고 참..
May, 2019
이틀 비 오고 날이 좋다. 기분을 메모하랬는데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미드 폐인 체험했습니다. 밥 대충 먹고 수면시간 엉망 됐고 편두통 왔습니다. 그보단 다음 시즌을 기다려야한다는 게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라고 쓰고 나 같은 환자 새끼 기가 차겠다 싶어 웃었다. 작업을 놔버려 손목은 얼마나 회복됐는지 알 길이 없고 늦어도 가을까지는 답이 나와야 재수술을 하든가 말든가 할 텐데. 청소기를 돌리다 뻐근한 느낌이 들어 문득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다. 형수와 저녁 약속을 했다. 주변에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직업군이 있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내게서 무언가를 캐치하려고 작정한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형 안심하라고 만나드리는 것이다. 단정하게 입고 가자. 세상 매너 있고 착하게 굴되, 단 ..
May, 2019
곁에서 오래 고생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런 것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고 알고 싶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는 지점까지 온다. 대화는 순조로웠고 나의 첫 질문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은데, 제가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잃지 않으실 겁니다. 의지가 있으니까.’ 당신이 언제나 내 의지 안에 있기를, 의지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멀리 가지 않기를, 어디에든 나를 홀로 두지 않기를, 돌아오는 길 진심으로 바랐다. 흐린 저녁, 너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핸들을 꼭 쥐었다. 씨발, 살아야 한다.
May, 2019
생일이 다가와 반지를 하나 해줬다. 소비는 확실한 행복이라 했던가. 작고 반짝이는 것은 진리라 했던가. 웃고 소리 지르며 좋아하길래 뭔가 더 질러야 했나. 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가운데 흐뭇하다. 행복은 별것도 아니라서 웃고 웃게 해 줄 수 있으면 족하다. 그러니까 오늘은 행복한 날. 본인에게 쓰는 것에는 늘 인색한 사람, 내가 주는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주는 사람. 그래서 항상 애틋하게 만드는 사람. 기술인가? 선수지 너? 축하해, 나를 만나러 세상에 와 준 일. 아주 축하해, 운 좋게 너를 만난 나란 놈.
May, 2019
어떤 아침은 커피가 내려오는 속도에 조바심이 난다. 괜히 성급하다. 그걸 뚫어져라 보면서 아 빨리빨리 야야 빨리빨리 그러고 있으면. 그거 보고 있지 말고 얼음 가져와요. 하고 웃는다. 사소한 것에라도 너무 몰두하거나 급해지는 시점에 시선을 돌리고 멈추게 하는 사람의 다정한 마음은 오래 기억에 남아 커피를 내릴 때마다 떠오르고 나는 그게 참 고맙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을 때 나를 믿게끔 돕는 유연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너무 오래 힘들게 하면 어쩌나 싶은 여전한 두려움 속에서 나는 더디게 데워지고 있다. 천천히 하자.